어느 이야기

2007. 1. 29. 09:42
금년 후 곧 일흔 되시는 어느 할머니 말씀.

일제에, 6.25에 다 겪으신 분인데 아직 생존해 계신 사촌분이랑 만날때마다 대뜸 서로 한숨을 내쉰다고 한다. 그때를 지나 서로 다행히 살아있는 것과 죽어 보냈던 많은 사람들 떄문에.

할머니께서 어렸을때, 그러니까 아직 일제치하 였을때, 사촌언니 한 분과 그 동생분이 위안부로 끌려가셨다고 한다. 한분은 어떻게 어떻게 돌아오셨지만, 다른 한분은 아직 돌아오시지 못하고 하셨다. 아마 객지에서 돌아가셨으리라.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었어도 자신이 일본의 위안부로 끌려갔을테지만, 당시 어려서 일본군에 끌려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6.25가 터졌다. 북측에서 폭탄을 떨어트려 다리를 부셨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임시다리가 가설되어 그 위를 지나서 이동도 많았다. 피난시의 임시다리가 그렇겠지만 사람도 많이 지나가고, 상태도 좋을리가 없는터라 엄청 출렁거려 다리를 건너는데에 요령이 필요했다. 위 아래 출렁거리는 다리에 박자맞춰 자기 다리도 움직여가며 앞으로 가야 하는데, 그런 불안정한 다리를 나이 드신분들은 건너가기 무척 힘드셨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소 장사치들도 강을 건너가긴 가야하는터라, 데리고 다니는 소들을 끌고 다리를 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다리상태가 또 좋지 못하니, 서로 서로 묶여있는 소들을 조금씩 풀어 한무리씩 강에 떠밀어 강을 건너게 했다. 그게 또 용하게도 작은놈 큰놈 가릴거 없이 무척 헤엄을 잘 쳤다. 꽤나 큰 폭의 강이 었음에도 무리 없이 잘 건너갔다고 한다. 그 소들이 건너가는 모습이 하도 용해서 피난행렬의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가다 말고 다리 한쪽으로 와서 구경하기도 했다. 건너간 소는 신기하게 주인의 말도 잘 들어서 '멈춰' 하면 멈추고 '이리와'하면 주인에게 가서는 순순히 다가갔다. 그리곤 순서대로 묶여져서 다시 주인을 따라 이 시장 저 시장 끌려갔다.

그리고 또 다리를 건너는 피난행렬 끝에는 대게 미군(할머니께서는 흑인들이라 지칭하셨다)들이 몇명 서 있어서, 여자들을 찾아내 '색시! 색시!' 라고 부르며 데리고 갔다고 한다. 무척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그 미군들이 데려간 여자들은 못할짓을 당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일이 계속 있어 여자들을 남자처럼 꾸며 어떻게든 그 눈에서 가리려 했지만 용케도 잘 찾아내 데리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전쟁이 진행되고 북군이 몰려와서 점령당한 마을에서는 지역 유지, 혹은 경찰서 및 관공서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죽여 버렸다고 한다.

당시 그 할머니의 아버지도 경찰서장이셨다. 때문에 집안 자체가 멀쩡할리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살아서 산에 숨어들어가셨는데, 아버지를 내놓으라며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외동딸이신 할머니를 떄리고 괴롭히셨다고 하셨다. 끝내에는 총을 뺴들어 죽이려고 하셨는데, 집에서 키우던 새퍼트가 총을 빼들어 쏘려는 사람에게 달려들어 그 사람을 공격했고, 그 개를 향해 총을 쏘았고 그렇게 그 개는 죽었다.
  '저 개놈의 자식 떄문에 기분만 잡쳤네, 내일 와서 너희 아버지 안 내놓으면 정말 쏴죽인다'
라고 말하며 돌아갔고 결국 할머니는 그 새퍼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셨다.

그 개는 할머니의 아버지가 노루사냥을 하실때 알아서 노루가 잘 도망하지 못하게 아래에서 위로(아래에서 위던가?) 몰아서는 노루가 멈칫 멈추어 있을떄 아버지가 직접 총을 쏘아 잡으셨다. 많이 사냥도 다니셔서 몇십마리씩 잡으셨다고 하셨는데, 그런 영리한 개가, 할머니가 위험할때 달려들어 그 할머니를 살려내고, 대신 죽어버렸다. 그때 그 개가 널 살렸다며 할머니의 사촌과 만나게되면 서로 이야기 하신다고 하셨다. 때문에 이 후 길을 가다가 비슷한 큰 개들을 보면 그 떄 그 개가 생각나서 멍하니 보시게 되신다고 하셨다.

결국 그 개 덕분에 살아남아 다음날 아버지를 따라서 산속으로 숨어들어 가셨다. 오래된 나무의 빈 속에서 안전할때까지 아버지와 계속 숨어지내셨다고 한다. 집에 남으신 그 할머니의 어머니는 곧 죽을사람처럼 매일 누워 끙끙 대셔서 다른사람의 눈을 속이려 하셨다. 하지만 정말 속은 정말 그러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념적이유 떄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갈때 즈음 그 할머니의 작은아버지꼐서 해당마을의 주동자로 앞장서시고 일을 진행하셨다고 한다. 북군의 점령 이 후 이건 아니다 싶어 스스로 총대를 메시고 사람들을 살리려고 일부러 일을 자청 하셨다. 그렇게 북군의 치하에서 그 밑에서 일하며 그들에의해 주적으로 지칭된 사람들을 오히려 피신시키고 숨겨주어 여러 사람을 살리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도 한계가 있었고 마을내에서 여러사람들을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이 사람들이 죽었다. 또한 전쟁이라 군인들도 죽었다. 지금으로 상상하기 힘들정도로 군인들의 죽어 가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북에서 온 북군 청년들이 죽어가는 모습은 '빨갱이'도 아니고 '북괴'도 아닌 세상 그 누구와도 다를바없이 그들의 고향 사투리로,
'어머니, 죄송해요'
'어머니 아버지, 먼저갈게요'
또는 사랑하는 그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고,
그 할머니의 앞에서, 길가에서,
그렇게 죽어 갔다고 한다.

연합군이 올라왔다.
다시 마을은 연합군의 점렴하에 돌아왔다.
북군의 치하내에서 그 아래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라고 불리며 체포되었고, 다시 마을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 떄 할머니의 고모 세 분이 계셨는데 그 중 고모 두 분의 가족 중에 누군가가 북군에 동참을 했었고, 그 일로 그 두 고모네 가족 전체가 총살을 당했다. 그 외에도 이전 북군의 치하시에 죽음을 당한 가족이 이를 복수하기 위해 싸움이 빈번했는데, 이 이유로 사촌끼리 서로 죽이는 일도 빈번했다.

그 와중에 주동자로 일을 하신 그 할머니의 작은아버지도 체포되어 붙잡혀가셨다. 숙모께서는 작은아버지를 살리시기위해 마을을 돌아다니시면서 북군점령 당시 작은아버지께 도움받으셨던분들에게 청원서를 부탁드렸고, 그렇게 모두 300개를 모아 담당 부서에 보내셨다. 당시 작은아버지와 함꼐 2~3백여명이 같이 체포되어 들어갔지만, 결국 작은아버지 단 한 분만 살아서 나오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이 고문을 모질게 당하셔서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지셨고, 나오시고 나서도 그리 오래 사시지 못하셨다고 하셨다.

그런 작은아버지이시지만 그 할머니의 아버지는 자신의 동생인 작은아버지를 욕하며 죽이려 하셨고. 그 후로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실때도 아버지는 가보시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단지 북군 점령시 호되게 당했던 다른 일들과,  동생이 북의 이념적 활동을 하셨던 이유로.

그렇게 전쟁이 끝났고, 세상은 나름대로 달라졌다. 박대통령이 고속도로를 놓았고, 전대통령이 광주참사를 일으켰고, IMF가 터졌고, 노대통령이 청남대도 개방되었다.
그리고 최근 노대통령이 개방한 청남대를 가보셨는데, 돌아다니는 중에 자신을 포함한 비슷한 나이대의 할머니들 대부분 청남대를 보고서는 치가 떨리셨다고 하셨다. 당시 그 시절 밥 못 먹어 죽고, 치료 못해 죽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정작 그 때 건립한 청남대에는 그렇게 호화롭게 만들어 놓은꼴을 보니 참 울분이 터졌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세월은 지나, 그 할머니도 결혼하시고, 그 할머니의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그런 지금은 손자 뻘 아이에게 그렇게나 아픈 이야기를 옛 이야기 하시듯이 말씀하시듯이 이야기를 해주시고 그렇게 지금의 이야기는 끝이났다.
Posted by Gen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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